굿모닝.
아침에 눈 떠보니 언니가 카톡으로 나의 부모님 결혼 사진을 보내준거야. 지난주에 조카가 군대 갔는데 엄마 아버지 생각이 난다구. 그래서 이김에 나도 나의 부모님을 너희들에게 소개해 볼까하구.
아버지는 크리스천이 아니셨는데, 엄마랑 선보고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크리스찬이 되기로 하셨대. 외할머니가 전도사님이셨거든. 그땐 아버지에게 크리스찬이란 술담배를 안하는거였대. 그런데 우리 시골에 교회가 없으니 아버지 땅에다 교회를 짓고, 용문산 기도원에 계시다는 여자 전도사님을 모셔와서 교회를 시작하시게 돼. 난 어릴적에 우리 아버지가 교회 주인인줄 알았어. 건물 관리며 전도사님 월급준다 믿었거든.
아버진 지역 유지셨어. 땅도 많았고 농사 짓는 일꾼들도 많았었구. 그러시면서 새마을 운동의 기수셔서 어디 무슨 개발을 한다하면 찾아가셔서 일하곤 하셨어.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상도 몇개 타고 그러셨어..아버지는 교회를 교육의 장소로 삼으셨어. 특히 할 일 없어 노름만 하는 농촌의 겨울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고 찬송가 성경책 보면서 한글도 가르치시고 동네 청년들에게 태권도나 탁구도 가르치시고.
그러다가 74년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집회를 다녀오시고는 가슴에 '나는 찾았네'뱃지를 달고 다니시면서 동네방네 전도를 하시게 돼. 그때에 아버지는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셨대. 그리고 이제 용문산파가 아닌 장로교 통합측 교회를 세우시게 돼. 이번엔 동네 밖에다가. 영락교회의 도움을 받아 목사님도 오시게 되었어. 그때 내 나이 다섯살정도.
그런데 먼저 세운 교회 사람들이 새로 만든 교회에 쳐들어와 싸움이 일어났어. 그때 목사님이 쓰러지셔서 급하게 우리집에 모셔오고, 난 그때 엄마를 도와서 방에 불을 지피고 심부름을 했었어. 그때에 목사님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남의 이빨을 부러뜨렸다고 교도소에 가시게 돼. 그땐 엄마가 네째 동생을 임신하셨을때야.
난 어릴적부터 약하다고 부모님의 특별 대접을 받었어. 감기만 걸려도 고피가 양재기로 받아내곤 했는데, 나중에 출산 할때서야 피가 멈추지 않아서 검사해보니 유전적으로 혈유병 인자가 있었던거더라구. 내가 아프기 시작하면 엄마는 옆에서 울고 기도하고, 아버지는 물수건으로 이마며 얼굴이며 닦아주고 업어주던게 생각나.
엄마는 신장이 안좋으신거였는데, 처음 오진으로 몰랐다가 결국 돌이킬수 없을 때에서야 알게되었어..우리.시골에 버스도 안다녀서 엄마가 아프시면 동네 청년들이 리어카에 엄마를 실고 6km거리의 읍내로 가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서울병원으로 가시곤 했는데, 보통 일주일 혹은 이주일 입원하시다가 내가 4학년 봄에 입원하셔서 크리스마스 때에 hopeless discharge를 하셔. 그리고, 이듬해, 내가 5학년 봄 4월에 돌아가셨어.
아버진 농사도 일꾼에게 맡기시고 병원에 계셨었는데, 이때부터 난 집안 일을 도맡아 하게 돼. 언니는 중학생이라 읍내에서 따로 밥해주던 언니랑 자취를 했었거든. 아침에 일어나서 밥해먹고 동생들 챙기고, 빨래, 청소하며 소녀가장처럼 학교에 다녔던거야.
그러다가 중학교 읍내로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들이 나를 엄마 없는 애라고 부르더라. 엄마 없는 애가 반장 되었네, 또 일등을 했네...학교에서 올 때는 반찬가게에서 반찬거리를 사들고 오는 내 모습이 중학교 시절이였어.
고등학교는 언니를 공주로 전문대을 보내려고 나까지 끼워서 공주사대부고로 보내셨어. 그때는 나보다는 언니가 주말마다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해야 했어. 사실 난 대학을 가고자하는 욕심도 기대도 없었어. 대학가서 뭐하게??
처음 한양대에 와서 언제쯤 그만 다닐까 생각만 했었어. 간호학과도 내가 원한게 아니였어..그런데 그때에 CCC에서 친구들을 만난거지. 처음 경험한 것은 경상토 사투리. 이게 한국말인가? 치환이, 지훈이...말할 때마다 너무 웃기는거야. 아니, 윤호는 충청도 사람인 나보다 더 말이 느리구...모두들 학교 다니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는거 같드라구.
그때 하룡이가 있었어. 결국 재수하여 서울대에 갔었지.
되돌아보면 90년 신입생 첫학년때 친구들을 안만났으면 난 한양대를 졸업하지 않았을거 같아. 특히 그때에 동민이와 재욱이는 내게 묘한 기분이 들게 했어. 왜 저렇게 열심히 살까...그런 신기한 느낌. 재욱이는 귀찮을 정도로 내게 도전같은 것을 주었어. 영향력 있게 살라는...
다시 우리 부모님 얘기로 돌아가면, 나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엄마 아버지가 과수원 나무 밑에서 오손도손 앉으셔서 엄마가 내 온 새참을 먹던 그 모습이야. 임종의 순간에 아버지 무릎에서 편하게 누워 계시던 엄마의 모습은 천사 같다 생각했구.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집 가세는 기울었지..엄마의 병원비로 과수원도 팔고 논밭도 팔고, 이사도 해야했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게 신기했어. 이제 동네 사람들도 점점 잘 살게되고, 아버지 말씀처럼, 우리집 대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사람들은 커녕 개미 한마리도 문을 넘어오지 않는다 하셨거든.
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엄마를 떠올려..아프실때도 아프단 소리 한번 안하셨고, 아버진 교회, 새마을 운동으로 나가셔서 없으실 때가 많았는데, 일꾼들 관리며 밥해주는 아줌마들과 점심 내가고, 그 와중에 울 엄마는 노래랑 얘길 잘 지어내곤 하셨어. 내가 무섭다면 무서워말고 노래하라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내시곤 했거든. 또 내가 밥을 잘 안먹어서 숟가락에 밥 한술을 떠서는 노래를 부르시는거야, ' 입을 크게 발려~~아 암' 하는 노래. ㅎㅎ
갑자기 내가 나의 부모님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에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나 얘기하면서 사실 우리가 우리 각자의 속 얘기를 나눈 것은 별로 없구나 싶어서 이제서라도 나누어 보려구. 이제 우리도 부모가 되었잖아. 난 새삼 우리 부모님이 새롭게 느껴졌어.
처음 엄마 돌아가시고는 너무 슬퍼서 생각을 안하려 했고, 대학때는 아마도 말해봤자 내 심정을 친구들이 알까까 싶어 말을 안한거 같아.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하셔서는 새엄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안하다가,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어쩔수 없이 가슴에 묻어 놓은 엄마 생각이 나오는거 같다.
월요일 아침에 왠 청승인지 미안하지만, 이런 나의 속 얘기를 오십이 되어 나눌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하나님께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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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의 삼엄한 격리속에서 목도리를 짜고 있다.
뜨개질의 기본은 목도리 짜기다. 물론 어려운 패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한 겉뜨기와 안뜨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목도리를 쉽게 짤 수 있다.
난 영국에 와서 유튜브를 보며 뜨개질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목도리와 모자 등을 뜨다가 점퍼, 스웨터를 뜨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좋아라 하더니, 이제 10대가 되면서 가게의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편 옷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점 뜨개질이 귀찮아지고 있었는데 바이러스로 인한 강제적 집콕으로 처박아 놓았던 바늘과 털실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초심의 마음으로 목도리를 뜬다기 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집콕의 생활속에 오히려 쉰다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앉아 있고 싶어 목도리를 뜬다. 뜨면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겉뜨기와 안뜨기만 하는 것은 너무 지루할 것 같아 패턴을 찾아보았다.
딱 네 줄의 설명 뿐인 이 목도리의 패턴. 단순해 보이지만 그래도 뭔가 색다르다.
오늘은 뭔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조심이 살펴보았다. 뜨개질을 하다가 잘 뜨고 있는지 첫번째 점검은 바늘에 걸려 있는 콧수가 맞냐는 거다. 세어보니 50코야 하는데 48코다. 코를 놓쳤나 보니 그렇지는 않다. 이 단순한 패턴에도 콧수를 늘이고 줄이는 부분이 있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콧수를 교정하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지만, 이 목도리의 패턴에서는 다시 한 코 한 코 되돌아가는게 최선이다. 두 줄까지 되돌아가서야 다시 제 코를 찾았다.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거다. 이제 패턴대로 쭉 떠가면 된다.
내가 뜨고 싶은 옷의 마음에 맞는 패턴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털실가게에 쌓이고 쌓인 것이 털실이고, 널려 있는 게 패턴인데 말이다. 패턴을 결정할 때는 당연히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봐야 하겠지만, 한 코 한 코 떠야 하는 방법이 내게 익숙하고 할 만한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기다란 실 하나가 이렇게 저렇게 대바늘로 엃키고 설켜야 옷이 되든지 목도리 되는 거다. 그래서 어디선가 한 코라고 빠진다면 그 코에서부터 한 코 한 코 풀려 나가버린다.
패턴을 찾아 뒤질 때 마다 패턴의 문자들이 수학의 기호 같기도 하고 악보의 음표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을 때의 경이로움도 느낄 때가 있다. 종이 위의 음표들이 각각의 악기들과 사람들의 목소리로 표현되어 어울리는 그 감동. 물론 나는 음악도 모르지만 그런 경이로는 뜨개질 작품을 해 본 적은 없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뜨개질을 누가 언제 어떻게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순간에 뜨개질을 하는 것은 나만의 발명품이 아닌 것은 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뚝딱 나타난 게 하나도 없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거다. 그리고 나도 우리 속에 하나다.
갑자기 내 마음 속에 깨닫게 된 결론이다. 뭔가 하면서 살자. 크든 작든 열심히 하자. 보람을 느끼자. 그리고 왠만하면 이 격리 중에 이 목도리를 끝내자
meddle ; to try to change or have an influence on things that are not your responsibility, especially by criticizing in a damaging or annoying way:
Meddling
지난 한달동안 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단어가 'meddling' 이다. 내가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 그것도 사랑이나 친절함으로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우월감의 증거로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한 자아 비판의 시간을 가졌다는거다.
Meddling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달전에 가깝게 사는 싱글맘이 십대 아들이 자기 말을 안듣고 심지어는 욕도 한다면서 남자 어른으로서 아들을 꾸짖어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 하러 왔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아들과 대화도 해보고, 컴퓨터에 관심이 있다하여 컴퓨터 언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남편이 서너번 정도 만나고 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 내가 그 아이를 도와 줄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나: 뭔가 드라마틱하게 바뀔거라 기대하지마. 한두번 만나기보다 오랫동안 만나주다 보면 그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거야.
남편: 난 솔직히 그 아이나 엄마가 불쌍하단 생각도 안들고, 도와줘봤자 별로 변할거 같지도 않아.
나: 그럼 왜 그 아줌마가 부를때마다 가보고 컴퓨터도 가르쳐주는건데?
남편: 내가 대학때는 교도소로 봉사할동을 갔었고, 요즘은 재소자들이 출소하고 사회적응을 돕는 기관을 도와주잖아.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그 집이랑 똑같은 이야기야. 어릴적 비정상적인 가정(dysfunctional family).
나: 싱글맘의 아들이라고 다 범죄자가 되는건 아냐. 내 주위에 홀어미 밑에서 잘 자란 사람들도 많아. 나만 봐도 엄마 없이 자란 사람이야.
남편: 싱글맘의 아들이라고 모두 범죄자가 된단 말이 아니라, 범죄자들의 어린시절은 모두 불우했단 얘기야. 그 엄마도 한심하고 그 애도 한심한데, 내가 무언가를 안하면 10년후에 그 아들이 감옥에 있는게 상상이 되어서 맘이 괴로와.
나: 10년후에 감옥에 있어도 당신 잘못이 아냐. 그냥 당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인걸 해. 그리고 지금이야 급하니까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당신보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꺼지라고 할수도 있어.
남편: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10년전, 그 싱글맘은 비슷한 상황으로 내게 찾아왔었다. 타국에서 애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 나는 정성껏 도왔다. 나와 남편은 혹시라도 이 싱글맘이 사고라도 당하면 그 아들을 우리가 입양하자는 말도 했다.
그러나 10년후의 결과인 오늘을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그녀가 내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의 태도에 대하여 꼭찝어 말한 것이 '남의 일에 참견 말라'는 거였다. 'meddling'. 그 뒤로는 나와 그녀의 관계는 멈춰버렸다.
10년 후를 바라보는 오늘, 10년 전을 생각해보는 오늘. 난 혼란스러웠다.
간섭하지 말아야하는 '남'의 카테고리 안에는 나의 자식이나 부모도 포함된다. 부모기 성인이 된 자식의 일에 여전히 간섭하는 것을 많이 본다. 나의 경우엔 아버지가 재혼하시고는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부부의 관계속에 나를 끼어들게 하셨다. 새엄마에게 잘하여 흠 잡히지 말라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대신 해 줄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 이유는 우리 각자의 모습은 유일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각각의 존엄성이 있는거다. 결정권도 책임의무도 각자의 자유의지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걸 볼수만 있겠냐고?어쩔수 없다. 어느선까지는 도울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존엄성, 자존심까지 침범하는 것은 죄이다.
한달동안 그 싱글맘과 나의 남편이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집과 그집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하자면, 내가 한 행동과 태도에 대하여 잘잘못이 있었는지 난 모르겠다. 난 나와 나의 가족에게도 강요하지 않듯이, 그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친절한 건 아니였다. 되돌아 가도 난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겐 친절이라 생각한 일이 그 사람에겐 간섭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기가 원한 방향이 아니였든지. 어쨌든 오늘의 결과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거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과거를 바꿀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젠 나의 생각도 정리가 되는 듯 싶다. 후회보다는 앞으로 해야되는 결정에 남에게 나의 간섭을 섞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거다.한편으론 누구도 혼자 살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인생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묘미일수 있다.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친절과 간섭을 구별하며 산다면, 지난 날의 후회와 실패를 통해 뭔가 얻게 되는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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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숙아,
멀리서 보내준 카드와 손편지 잘 받아보았어.
독일에 올수도 있다는 소식이 나름 반갑기도 하다. 너의 남편의 전공이 도시 계획이라니, 유럽의 도시를 공부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 내가 아는 후배도 같은 전공이였는데, 영국에서 석사하고 직장 생활 조금 하다가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직장 생활 해. 한때, 싱가폴에서도 잠시 있었다는데, 그 모든게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특히 영국을 거치면서, 유럽 이주민이 사는 뉴질랜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구. 하나님의 뚯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기도 가운데, 선한 인도 하심을 받기를 나도 기도한다.
형숙아.
네가 나를 가까운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고마와. 나도 그런줄 알고 있었는데, 전화를 피하는 사람이 가깝기는 커녕 관계가 어렵거나 빚쟁이가 아닐까 난 생각해.
나에겐 가까운 누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인데, 넌 내가 친구들과 연결해주는 다리 같은 사람이라 생각이 들어. 뭐 그것도 괜찮아.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요즘 친구들과 줌 미팅을 하며 갑자기 기억난 일이 있어. 대학때, 항상 친구들 모임에 늦던 네가 어느날 정시에 나타난거야. 그래서 내가 무슨 동기로 정시에 왔냐고 물었더니, 치환이가 늦게오지 말라해서 그랬다는거지. 치환이가 한사람이 늦게 오면 친구들 모두가 기다린다는 말에 그제서야 깨달았대. 너에게 편안하고 영향을 줄수 있는 사람. 난 이제야 알았어. 단연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난 이제서야 알아서 네게 쪼끔 미안하긴 한데, 뭐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이른거라잖아. 이제 너도 나에게서 편해졌으면 좋겠어. 미안해 하지마. 이제 우린 멀리서 살잖아??
종종 나의 선의가 남에게 불편을 준다는 걸 깨달아. 서로가 불완전하니까 이렇게 알아가며 사로 커가는거라 난 믿어.
오늘 주일도 가족과 말씀속에 잘 보내길 빈다.
ps.'관계'에 대하여 내가 작년초에 써놓은 글을 보낼께.내 생각을 전달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것 같아서...